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드워드 1세 (문단 편집) == 평가 == 중세 잉글랜드인에게는 '''명군'''이지만, 스코틀랜드인에게는 '''악마'''의 현신이자 마왕 그 자체. 잉글랜드를 발전시키고 중앙 집권화의 초석을 쌓았으며 대외적으로도 큰 활약을 펼친 위대한 [[명군]]으로 손꼽힌다. 전략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는데[* 실제로 마상시합과 사냥을 좋아했다.] 수많은 전투를 치렀음에도, 루이스 전투 외의 패배를 겪어본 바 없고,[* 다만 프랑스와 벌인 전쟁에서는 변덕스러운 동맹군+불안정한 국내사정+중과부적의 여러 가지 악조건 때문에 이렇다 할 성과가 없었다.] 그나마도 이때는 자신이 총사령관이 아니었다. 또한 장궁의 도입을 권장했는데 이는 훗날 [[백년전쟁]]에서 연승의 요인이 된다. 한편으로는 성품이 대단히 완고했고 적에게는 무자비하다 못해 잔혹하였다. 레스터 백작 [[시몽 드 몽포르]]나 [[윌리엄 월레스]]와 같은 정적들에게는 사지를 찢어버릴 정도로 냉혹하여 이 때문에 [[폭군]]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게다가 상술한 유언을 남길 정도의 전설이 있을 정도로 성격이 지독했다고도 한다. 위에 언급한 내용처럼 머리도 좋고 군사적 능력도 굉장히 뛰어나서 기술과 자원이 훨씬 발전했던 후대 15세기, 16세기 잉글랜드의 왕들도 평정하지 못한 스코틀랜드를 거의 집어삼킬 뻔했고, 역사학계에서도 그가 조금만 더 오래 살았으면 여전히 입지가 불안하고 조직력이 엉망이었던 로버트 브루스의 군대도 격파하고 진짜 스코틀랜드를 석권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 많다. 실제 역사에서는 스코틀랜드는 일단 [[동군연합]]을 거치고, 그 후에 높은 자치권과 동등한 대표권도 인정받고 고유의 문화와 민족 의식을 지키면서 천천히 통합된 것과 달리, 만약 에드워드 1세가 정복에 성공했다면 일찍부터 강압적으로 통합되어 지금 우리가 아는 스코틀랜드와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강압적으로 통합된 웨일즈는 현재 잉글랜드에 거의 동화되었다. 스코틀랜드는 웨일즈보다 체급이 더 크고 거리가 더 멀기에 동화가 덜 되긴 했겠지만.] 스코틀랜드에서는 숙적 잉글랜드의 군주들 중에서도 이렇게 자국 역사에 가장 큰 위협이 되었던 이 왕을 공포와 경외심을 같이 담아 '''스코틀랜드를 때리는 망치'''(Hammer of the Scots)라고 부른다. 다만 스코틀랜드인들과 싸우는 와중에 프랑스와도 전쟁을 벌여 재정에 심각한 타격을 몇 차례 입었으며, 이를 해결하려고 계속해서 새로운 세금을 매겨 막대한 전쟁 비용을 충당하려 했다. 이는 당연히 잉글랜드 귀족들과 농민들의 반발을 샀다. 특히 경비를 조달하기 위해 돈이 많았던 [[유대인]] [[상인]]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추방하였다. 때문에 말년에는 민심에서 멀어졌으며, 잉글랜드 상공업에서 큰 영향력을 지녔던 유대인 상인들이 해외로 망명하거나 추방되는 바람에 의도치 않게 잉글랜드 경제에 타격을 주기도 하였다. 이 점은 후대에도 큰 실책으로 손꼽힌다. 스코틀랜드의 경우 에드워드 1세의 개입 탓에 분쟁이 생겼지만, 그는 이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하고 후대의 문제로 만들었다. 특히 에드워드 1세와 귀족들 간의 갈등은 그의 아들인 [[에드워드 2세]] 때로 접어들면서 걷잡을 수 없는 파국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이러한 오점에도 불구하고, 에드워드 1세가 무수한 업적을 남긴 뛰어난 왕이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지금까지도 잉글랜드인들에게 위대한 군주로 칭송받기에 충분한 편이다. 그야말로 잉글랜드의 초석을 다진 왕으로 평할 만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